장기표 별세 혁명가의 마지막 길
장기표 선생의 생애와 업적
장기표 선생은 194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이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한 인물입니다. 그는 독재, 불의, 특권에 맞서 싸운 '거리의 혁명가'로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 민청학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 여러 차례의 사건으로 9년간 옥살이를 하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했습니다.
평생을 바친 민주화 운동
장기표 선생은 90년대 사회주의 붕괴 후에도 제도권 정치로 가지 않고, 자신의 이상 정치를 추구하겠다고 7번의 창당과 낙선을 거듭했습니다. 지난 4월 총선 때 '특권폐지당'을 끝으로 그의 정치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파렴치한 짓"이라며 거부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항상 순수함과 정의를 지키는 인물이었습니다.
-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
- 민주화 운동 관련 사건들로 9년간의 옥살이와 12년간의 수배 생활
- 제도권 정치로 가지 않고 7번의 창당과 낙선을 거듭하며 자신의 정치를 추구
고인의 인간적인 측면
장기표 선생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반려자 조무하 여사는 "살 만큼 살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생명을 가진 인간의 의무이자 순리. 그러니 울지 마라"는 고인의 마지막 말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말은 고인의 삶과 철학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민주화 운동 동지들 사이에서도 그는 '세상이 다 취해도 홀로 깨어 있으려는 순수함'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장례와 추모 식
장기표 선생의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되었으며, 장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발인은 26일, 장지는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많은 조문객들이 그의 업적과 인생을 기리기 위해 빈소를 찾았으며, 그의 삶과 업적을 회상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장기표 선생의 정치 철학
장기표 선생은 '특권폐지당'을 창당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그는 권력과 특권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철학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며, 그는 항상 약자의 편에서 싸우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철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기타 활동
민청학련 사건 | 내란 음모 사건 | 청계피복노조 사건 |
장기표 선생은 다양한 민주화 운동 사건에 깊이 관여했으며, 그 중에서도 민청학련 사건, 내란 음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장기표 선생이 왜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쳤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그의 활동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족과 유족
장기표 선생의 유족으로는 아내 조무하 여사와 딸 하원, 보원씨가 있습니다. 특히 아내 조무하 여사는 그의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로서, 함께 민주화 운동을 이어왔습니다. 조 여사는 고인이 남긴 철학과 삶의 지혜를 후대에 전하며, 그가 남기고 간 유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유산 및 미래 세대에의 영향
장기표 선생이 남긴 유산은 앞으로도 많은 세대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의 삶과 철학은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으며, 그가 실천해온 정의와 평등에 대한 신념은 현재와 미래의 사회운동가들에게 중요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유산은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정의와 평등의 중요한 지침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