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트 시대, 도라지의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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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트 시대, 도라지의 퇴장

1947년, 조선은행의 첫 물가 조사

광복 3년 차인 1947년,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은 서울에서 최초로 물가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당시 조사원들은 수십 개 품목의 가격을 조사했지만, 곧 전체 가계 지출의 절반가량이 단 세 가지 품목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주인공은 쌀, 장작, 그리고 고춧가루였습니다. 이 세 품목의 지출 비중은 무려 46.3%에 달했습니다. 이는 당시 국민들이 한 끼 식사와 난방을 위해 필수적으로 지출해야 했던 현실을 반영하는 서글픈 자화상이었습니다.

고춧가루가 차지한 비중의 이유

가난했던 시절, 주식인 쌀과 난방용 장작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양념인 고춧가루가 왜 큰 비중을 차지했을까요? 당시 서민들의 식탁은 고기나 생선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채소 반찬조차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값싸고 구하기 쉬운 시래기, 배추, 무 등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만든 김치와 장아찌가 주요 반찬이었습니다. 다른 부재료가 부족해 오직 고춧가루의 매운맛에 의존해 맨밥을 넘겨야 했던 시절, 매운 김치 한 조각으로 허기와 추위를 달래며 생존을 이어갔던 '생존형 매운맛'의 시대였습니다.

1965년, 전국 단위 소비자물가지수의 출범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경제 성장 궤도에 오른 1965년, 전국 단위의 현대적 소비자물가지수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조사원들은 전국 가정을 직접 방문해 쌀, 난방용 석유, 목욕탕 입장료 등 111개 대표 품목의 가격을 손글씨로 기록했습니다. 이는 당시 국민 생활의 다양한 면모를 반영하는 중요한 통계 작업이었습니다.

물가 바구니의 변화와 디지털 시대

60년이 흐른 지금, 물가 바구니는 455개 품목으로 확대되었고 조사 방식도 크게 변화했습니다. 태블릿PC를 통한 현장 입력과 온라인 쇼핑, 디지털 서비스 가격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수집하는 등 첨단 기술이 도입되었습니다. 국가데이터처(구 통계청)는 5년마다 바구니를 개편하며 시대 변화를 반영합니다.

2025년 개편안의 특징

최근 발표된 2025년 기준 개편안에는 챗GPT, 제미나이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 구독료, 클라우드 저장공간 이용료, 온라인쇼핑 구독료가 새롭게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스마트워치, 전기차 충전료, 조립식 수납가구, 영유아 강습료 등 현대인의 생활과 밀접한 품목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식품·외식 분야에서는 마라탕, 식사 대용 샐러드, 밀키트가 포함되어 젊은 세대의 소비 트렌드를 반영했습니다.

도라지와 고사리의 퇴장

반면, 오랜 기간 물가 바구니에 포함되었던 고사리와 도라지는 가구당 월평균 지출액이 기준선 이하로 떨어져 이번 개편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예전처럼 나물을 직접 준비하는 가정이 줄어들고, 명절 차례상과 제사 문화가 변화하면서 이들의 퇴장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이외에도 땅콩, 부탄가스, 습기제거제, 싱크대, 회화용구, 블랙박스, 외장하드 등도 바구니에서 빠졌습니다.

현대 풍속사의 기록, 물가 바구니

물가 바구니의 품목 변화는 한국 현대 사회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2020년 개편 때는 넥타이, 프린터, 사진기 등이 제외되었고, 2011년에는 종이 사전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생활 방식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변하지 않는 원년 멤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5년부터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품목들이 있습니다. 쌀, 쇠고기, 돼지고기, 소금, 간장, 된장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며, 라면, 소주, 맥주, 담배와 함께 오랜 기간 물가지수의 중심을 지켜왔습니다.

시대의 거울, 물가지수

1947년 쌀과 장작, 고춧가루 값을 적던 시절에서부터 오늘날 AI 구독료와 밀키트를 소비하는 시대까지, 물가 바구니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합니다. 도라지와 고사리의 퇴장은 아쉽지만,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변화임을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물가지수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장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로 남을 것입니다.

글: 어수웅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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