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야 장기표 암 투병 끝 별세
전태일 분신과 사회운동 시작
장기표 원장은 194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의 사회운동 여정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학생장이었던 장 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만나 시신을 인수받고 장례를 주관하였습니다. 이후 많은 전태일 자료를 수집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민중당 창당과 정치 활동
민주화 이후인 1990년, 장기표 원장은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여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1992년 총선을 시작으로 제도권 정치 입문에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일곱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모두 낙선했습니다. 마지막 선거에서는 보수정당 후보로 나섰지만, 역시 원내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국회의원 특권폐지 운동
장기표 원장은 말년에는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특권폐지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로 활동하면서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 면책특권 폐지, 정당 국고보조금 폐지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원외정당인 가락당에 합류하여 활동을 이어갔지만, 의회에 진출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 강렬한 학생운동 참여
- 민주화 투쟁 과정의 어려움
- 정치 도전과 실패
민주화 운동과 수배 생활
장기표 원장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동안 여러 차례 감옥 생활을 했으며, 12년간 수배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민주화 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철학은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담낭암 투병
지난 7월, 장기표 원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담낭암 말기로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공개했습니다. 그는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과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습니다. 고인은 "자연의 순환질서에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태일 기념사업회와 평전 발간
장기표 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전태일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해 '전태일 평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2009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전태일 정신을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사회운동의 대부
장기표 원장은 "재야운동 대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그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사회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장례와 유족
장기표 원장의 장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치러질 예정입니다.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씨와 딸 하원, 보원씨가 있습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 병원에 마련되었습니다.
생애 발자취
연도 | 주요 사건 | 내용 |
1945년 | 출생 | 경남 밀양에서 출생 |
1970년 | 전태일 분신 사건 | 사회운동의 시작 |
1990년 | 민중당 창당 | 진보정당 활동 시작 |
2022년 | 별세 |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별세 |
장기표 원장의 생애는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정치 도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헌신과 노력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의 발자취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고인의 철학과 가르침
장기표 원장은 늘 인간 해방과 사회 정의를 추구해왔습니다. 그는 항상 자연의 이법과 순환질서를 강조하며,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철학을 견지했습니다.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를 중요시했던 그의 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남긴 유산
장기표 원장은 많은 유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헌신, 사회 변화를 이끌기 위한 노력, 평생 동안의 철학과 인생관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발자취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